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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순교자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묵시 7,14)

여산 순교자들

성인·순교자들 여산 순교자들

1868(무진)년 여산의 순교자들

1. 김성첨 토마스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산 넓은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는 병인박해 때인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하여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성첨은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며 완강히 저항하였고,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간 것이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그를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 토마스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뉘우치고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첨 토마스는 “만 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며 여산 부사에게 하루빨리 이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함께 여산으로 압송되어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그가 준 것이 사실이라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닦달하였다.

김성첨은 자기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그 출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도 일당을 불라면서 혹독하게 형벌을 가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신도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영장은 더욱 분노하여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커녕 태연자약하였다. 영장은 다시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하여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도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성첨 토마스와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 토마스와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우리가 (치명할) 이 때를 기다렸는데,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으라.” 하며 격려하였다.

그리고 신도들과 함께 아침, 저녁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그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어냈다. 신도들에게 감옥은 형별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신도들의 기도 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포졸들은 “저 놈들은 죽어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하는가.” 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 토마스와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그와 그의 종손 마티아는 11월 21일(1869년 1월 3일) 교수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2. 김성화 야고보

그는 강릉 김씨이며, 본래 충청도 진천 사람으로 고산 넓은바위에서 살았다. 병인(1866)년 1월 고산 포졸에게 붙들려갔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동네 신도들과 함께 잡혀 여산으로 끌려가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치명하니, 나이는 52세였다.

3. 손 막달레나(혹은 마리아)

손선지 성인의 딸로 금산 개적이에 산느 한정률(요한)에게 출가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잡혀 여산에 하옥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배교하자, 회개할 것을 권고하여 통회토록 하였다. 남편 한정률이 먼저 치명하였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즐거운 마음으로 교수형으로 치명하니, 나이는 27세이며, 때는 11월이었다.

4. 장윤경 야고보

고산 다리실 회장으로 무진(1868)년 6월 9일 다리실에서 문 회장, 이 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등과 함께 여산으로 끌려가 교수형으로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이며, 때는 1868년 10월 1일이었다.

5. 여산 순교자들의 참상과 일화

여산의 순교자들은 여러 형태로 처형되었다. 어떤 이들은 굶겨서 죽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얼굴에 종이를 바르고 물을 부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라는 방법으로 죽였다. 또 배다리 옆 연방죽터에 있는 옥터의 교수대 형장에서는 교수형이 벌어졌다. 그리고 제남리 뒷말 동쪽의 숲정이 처형장에서는 참수형이 집행되었다.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문서로 확인된 숫자만 23명이다. 그러나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치명한 분들까지 합하면 이 숫자보다 더 될 것이다. 특히 1868년 10월에 순교한 분들은 대부분 고산의 넓은바위에 살던 한 동네 사람들이었다.

순교자들이 옥중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신도들의 굶주림이 얼마나 참혹하였기에 오죽하면 옥사장의 동정심이 발동하였는지, 옥사장은 신도들에게 바가지를 주면서 옥 밖으로 나가 동냥을 해먹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빌어먹을 만한 곳도 변변치 못한 고을이어서인가, 신도들은 빈 바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옥사장은 그 신도들을 보고 “바가지를 주며 내보낼 때는 도망가라는 말인데, 바보같이 왜 돌아왔느냐!”고 호통을 쳤다. 신도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하였다.

신도들의 처형일은 어김없이 장날이었다. 옛 옥터가 있던 지금의 배다리 옆에는 미나리꽝이 있었고, 그 부근에서는 장이 섰다.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선전의 장소로는 장꾼들이 모여서 볼 수 있는 곳보다 더 좋은 장소도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처형당할 신도들을 풀어놓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들은 눈에 보이는 풀들을 정신없이 뜯어먹었다고 한다.

형관들은 순교자들을 처형한 후 미나리꽝에다가 집어던졌다. 신도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건져냈다. 그런데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았더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 배가 고파서 솜을 다 뽑아먹었던 것이다.

여산 동헌이미지: 여산 동헌
여산 숲정이 이미지: 여산 숲정이

6. 순교자들이 천호성지에 묻힘

신도들은 야음을 이용하여 시체를 건져 짚으로 엮어 만든 섬에 담아 한곳에 묻어놓았다. 그후 세월은 흘렀고 시체는 육탈되었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신도들은 이분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산을 택하였다.

신도들은 이미 1년 전에 전주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이 천호산에 묻혀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산의 순교자들도 당연히 그분들의 옆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이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83년 5월 묘지를 발굴하였을 때 확인되었다. 일명 방아골이라고 부른 곳에서 한 분, 현재 천호 성지에 서있는 십자가 아래 부분에서 한 분, 그리고 김성화(야고보) 외 여섯 분으로 알려진 무덤들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전해져 오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김성화 외 6명이 아니라 7명이었다. 한 분의 유해가 더 있었다.

그 당시 유해를 모신 신도들의 마음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던 듯하다. 이유는 1983년 5월 10일 유해를 발굴한 결과 나타난 상태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모두 한결같이 면상(面像)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연풍 성지에 묻혀있는 황석두(루카) 성인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있을 수 없다 하여 면상을 지표면에 엎어두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은 하늘이요 임금의 명령도 하늘의 명령이어서,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었으니 죽어선들 하늘을 마주보고 누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도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 순교자들의 신체 부위는 마치 장작다발을 쌓아놓듯이 두개골 밑에 신체 부위를 추려 다복다복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신도들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서 발굴하였던 그대로 각장하지 않고 합장(合葬)하였던 것이다.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1998, 316-324 참조)

여산 순교자들 무덤
이미지: 여산 순교자들 무덤

[ 무명 순교자 기도문 ]

영원한 생명이시며 진리이신 주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이 땅의 복음화에 밑거름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아
매일의 삶에 따르는 어려움을 꿋꿋이 참아 받음으로써
오롯이 당신의 진리를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관련성지

1. 넓은바위 성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인근 / 063-261-6012(고산성당)

2. 여산 성지 성당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영전길 14 / 063-838-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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