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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순교자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묵시 7,14)

성 이명서 베드로

성인·순교자들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St. Lee, Myeng-se Petrus
1821년 충청도 공주 출생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 순교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는 치명을 마치면 곧장 천국에 들어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주 이씨 임령대군의 후손으로 자(字)는 정선이며, 일명 재덕(在德)이라 불렀다. 그는 충청도 공주 태생으로 여겨지며, 대대로 내려오는 구교우 집 자손이었다. 그는 아버지 때 전라도로 이사하여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고창 신시동(新時洞)에서도 살았고, 그가 체포되기 몇 해 전까지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 살다가, 체포되기 얼마 전부터는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있었다.

그는 황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여러 자녀들을 두었다. 그의 성격은 온유하고 착하였으며, 체포되기 전부터 폐병(혹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 교우들 사이에 박해가 들이닥칠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조화서는 교우들에게 아무래도 머지않아 붙잡혀 갈지 모르니 피신해야 할 것이라면서, 만약 피신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는다면 교만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였다. 예수님도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셨는데, 그것은 교만하지 않으시려는 겸손한 태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명서는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피신해야 한다면서도 자기는 이미 병든 몸이라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주님께서 불러가실 것이고, 그때에는 신병도 영원히 나을 것이라고 하며 순교할 뜻을 밝혔다.

1866년 12월 4일 밤이었다. 전주 진영의 포교 강주봉의 지휘 아래, 노덕수, 유이권, 김재관 등 4명의 포교와 포졸 8명이 성지동 마을로 들이닥쳤다. 포교 일행은 먼저 조화서의 집을 거쳐 이명서의 집으로 왔다. 그는 막상 일을 당하자 자신의 건강도 그러려니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앞날이 걱정되어 마음이 달라졌다. 그래서 포졸들을 붙들고 사정을 하였다. 인정에 못이긴 한 포교가 이명서를 놓아주면서 오늘 밤 피신하지 않으면 다른 포교가 또 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명서는 피신하지 않고 집에 있는데, 12월 5일 새벽 어제 왔던 포졸들이 다시 왔다. 그래서 당황하고 있는데, 딸 마리아가 산으로 피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명서는 허겁지겁 산으로 도망치다가 쇠약한 몸이라 멀리도 못 하고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포졸은 이명서를 그의 집으로 끌고 가서 천주교를 가르쳐준 스승을 대고 책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천주교를 아버지께 배웠고 책은 없노라고 하였다.

그는 포졸들에게 끌려 조화서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조화서, 조윤호, 정원지와 함께 소양면 구진리 주막으로 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대성동 신리골에서 체포된 교우들과 함께 전주 진영으로 끌려왔다. 그는 전주로 압송될 때 몸이 불편해서 이불을 쓴 채 수레를 탔다. 성지동 교우들은 진영 앞뜰에 있는 구류간에 갇혔다.

이명서는 압송된 다음날부터 맨먼저 심문을 받았다. 영장(營將)은 천주교를 믿는가 확인하고는 천주교 서적을 둔 곳과 천주교 일당의 명단을 불고, 배교하라고 닦달하였다. 영장은 천주교를 믿는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믿는 것이 역적 행위가 아니냐면서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풀어주겠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국법에 따라 죽이겠다고 하면서 빨리 배교하라는 것이었다. 이명서의 대답은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르겠노라고 하면서 배교하기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책은 갖고 있지 않고, 일당도 있지 않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희생될 것이 분명한데 말할 수 없으며, 부모와 형에게서 배웠으므로 스승도 없다고 하였다. 이명서를 팔과 머리털을 뒤에서 엇갈리게 묵여 육모매질을 당하여 자시과 뒤틀려 관절이 빠졌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에도 놀랍도록 용감하게 잘 이겨냈다.

그는 12월 13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가면서 “오늘 우리가 모두 치명하면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가 진복자가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고 희열에 넘쳐 말하였다. 형장에 도착하자, 영장은 사형수들에게 다시 질문하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 조선 공맹(孔孟)의 도(道)는 아니하고, 서양의 도를 하느냐? 이제라도 곧 아니 하겠노라 말한다면 즉시 방송하여 너희 처자와 함께 살게 하겠으니 어찌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나온 대답은 이러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좋을 때만 부모를 부모라 하며, 어려울 때는 부모를 부모라 아니 하리오? 이치가 그러한즉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

영장은 죽기를 작정한 것을 확인하고, 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한 뒤, 사자밥으로 술 한 잔과 고기 한 점씩을 주었다. 이명서는 휘광이의 첫 칼에 목이 잘렸다. 그때 나이는 46세였다.

이명서가 처형된 후 1867년 2월 18일(양력 4월 3일)이었다. 오사현은 이명서의 동생 바오로와 조카, 딸 마리아와 남편인 사위 안영지(필립보), 그리고 조 베드로의 형제와 조카 등과 함께 순교자들을 가매장한 범바위(부엉바위)로 갔다. 그리고 이명서, 조화서, 정원지 등 세 분의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안장하였다. 그런데 세 분의 유해를 옮기러 갔을 때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유해는 이미 그 가족들이 이장해 가고 없었다.

그 후 이명서의 유택을 돌본 사람은 손자인 이준명(아나토리오 혹 아나돌)이었다. 이명서의 아들 근화(가롤로)와 며느리 박성녀(마리아)는 준명을 낳았는데, 마리아는 가롤로보다 먼저 세성을 떴다. 이 가롤로는 진안 어은동으로 들어가 담배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부모들이 세상을 떠나자 이준명은 근근자자하게 살면서 돈을 모아 진안 어은동 모시골에 4정보 가량의 산을 샀다. 그가 허리띠를 졸라매며 산을 산 까닭은 유상리 막고개에 초라하게 묻혀계신 할아버지 이명서를 그렇게 모셔둘 수 없다는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1920년 3월 22일 모시골로 할아버지를 이장하고, 부모는 그 말치에 모셨다.

그러나 이준명은 그것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조부의 치명터를 매입하여 치명비를 세우는 것이 꿈이었다. 이러한 꿈은 1929년 전주로 이사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치명터를 두어 마지기 매입하였지만 비를 세울 만한 경제적 능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문중이며 어은동 모시골에서 살았던 이춘화가 이 소식을 듣고 200원을 들여 1935년 화강암으로 된 십자가비를 세웠다. 이리하여 치명터를 교회 소유로 마련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이명서의 유해는 1968년 5월 10일 모시골에서 서울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1968년 병인 순교자 24명이 시복되던 해 2월 15일자로 교황청에서는 서울대교구 윤공희 주교에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을 의뢰해 왔다. 그래서 윤 주교는 1968년 4월 4일자로 전주교구장 한공렬 주교에게 협조를 의뢰하였고, 5월 10일 서울에서 파견된 신부들이 전주교구의 협조를 받아 유해를 파 서울로 옮겼다. 그러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후, 1984년 12월 전주교구로 다시 모셔왔다. 그리고 전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던 1987년 10월 20일, 전주 자치교구 50주년 상임위원회에서는 이명서 성인을 천호성지 성인들 묘역에 모시기로 결의하고, 1988년 10월 1일 이곳에 안장하였다.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1998, 297-300 참조)
성 이명서 베드로 묘지

[ 성 이명서 베드로 기도문 ]

거룩한 순교자들로서 십자가의 신비를 기묘히 드러내시는 하느님!
성 이명서 베드로로 하여금 온갖 유혹을 용감히 이기고
참신앙 고백으로 순교의 영광에 들게 하셨듯이,
세상사의 어려움으로 신앙에 항구하지 못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음 깊이 심어주신 신앙을 끝까지 간직하다가
마침내 아버지께서 주신 영원한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아멘.

관련성지

1. 전주 숲정이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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