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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순교자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묵시 7,14)

성 손선지 베드로

성인·순교자들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St. Son, Sun-ji Petrus
1820년 충청도 임천 출생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 순교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

밀양 손씨 판서공파의 후손이며, 일명 성운(成云)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손달원(이냐시오)이고 어머니는 임 세실리아이며, 1820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지난날의 林川郡 八忠面)에서 태어났다. 흔히 그의 태생지를 괴인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생가 동편에 지석묘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태중교우는 아니었고,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영세하였다. 어려서 품행으로나 재주로나 신앙심으로나 남달랐던 까닭에 1839년 순교한 샤스탕(정) 신부로부터 1837년 열여덟의 나이에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손선지는 김루시아와 결혼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한재권 성인이 살던 진잠 장인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장남인 손순화를 낳았다. 그 후 전라도 고산 다리실로 이사하여 얼마 동안 지내다가 다시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이사하였다. 거리서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이곳에서도 전교회장의 역할을 하였는데 그의 집을 공소 집으로 사용하였다.

손선지는 전교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옛 성현을 말처럼 어떠한 경우라도 웃는 얼굴이었으며,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는 신부들이나 교우들로부터 자기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전교회장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1866년 가을 추수도 다 끝나고 겨울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이었다. 나무꾼 몇 명이 손선지의 집 앞을 지나가며 자기들에게 하는 말이, 얼마 안 가 이 동네가 쑥밭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안 식구들에게 “곡식이 바람으로 제 줄기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천주꼐서 이번 박해에 나 같은 사람을 당신 창고에 거두어주시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조심스럽게 지냈다. 1866년 12월 5일 그날은 가족들과 일찍이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밖에서 집주인을 찾는 소리가 났다. 그는 예감이 포졸들 같아 가족들에게 뒷문으로 피하라고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자 문밖에는 낯선 사람들 한 패가 서 있었다. 그가 웬 사람들이냐고 묻자 담배를 사러 왔다는 것이다.

손선지는 팔 담배가 없다고 하자,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천주학쟁이로 지목되어 잡으러 왔다면서 체포하였다. 그가 체포될 때, 다행히 오사현이 포교 김재풍에게 구타는 말아달라고 부탁해서 별일은 없었다. 이렇게 끌려가는데 칠순 노모가 따라오며 울자 잘 다녀오겠다는 말로 위로하며 담담하게 떠났다. 그리고 정문호, 한재권과 함께 구진리로 끌려가 그날 밤은 주막에서 자게 되었다. 이때 평소 친분이 있는 오사현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서라도 손선지를 구해낼 요량으로 포교 최홍태에게 수작을 걸었다. 포졸은 대답하기를,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천주학을 하는 죄인에게 달렸으니 저자들이 배교한다는 말만 한다면 용서해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오사현은 손선지한테 가서 당신이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돈 안 들이고 석방될 것이니 천주학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손선지는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라며 그의 말문을 막았다. 다음날 대성동 신리골과 성지동에서 붙잡힌 일곱 사람은 전주로 가서 진영 앞 구류간에 갇혔는데, 대성동 교우들은 뒷마당에 있는 구류간에, 그리고 성지동 교우들은 앞마당에 있는 구류간에 갇혔다.

한편 손선지의 아들 순화는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여러 차례 전주에 왔었지만 그의 힘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사현을 찾아가 아버지의 사정을 알아보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오사현은 자기가 잘 아는 관리들에게 부탁하여 돈을 써서라도 석방운동을 하겠으니 돈을 마련해 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영 옥으로 가서 손선지를 면회하고, 가족들이 석방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정을 말하였다. 그후 아들 순화가 손선지를 면회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아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런 짓은 자신에게 큰 유감거리이니 당최 그런 짓을 말라면서 면회를 오는 것마저 금하였다.

감옥에 갇혀서도 교우들은 집에서 하던 대로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바쳤다. 그것이 군인들에게 시비거리가 되어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영장(營將)은 손선지를 심문하는데, 늘 천주교도를 심문하여 묻던 것처럼 천주학을 믿느냐, 천주교 성물과 책들을 바치라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대로 따르지 않자 팔주리를 틀어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영장은 다시 책을 바치라는 것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가 손선지의 집을 왕래한 사실을 물었다. 그래서 책은 없고 선교사는 다녀갔노라 대답하였다. 더구나 손선지가 전교회장이었던 사실을 알고는 심한 주리와 주장질을 하고 옥에 가두었다. 손선지는 팔이 부러져 자기 손으로 물 한 모금 먹을 수 없어 동료들이 도와주었다. 4∼5일이 지나 영장은 다시 심문하여 천주교를 믿는가 물었다. 그러자 천주교를 진실히 신봉한다면서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하자 곤장을 치고는 그를 하옥시켰다.

그런데 들리는 말이 내일 천주교도들을 처형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는 함께 갇혀있는 김사집(필립보)에게 소창옷(옛날 중치막 속에 입던 웃옷)을 벗어주며 “나는 내일이면 죽으러 가네. 죽을 사람에게 이 옷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옥에 남아있을 자네 옷이 시원찮아 추울 테니 자네나 입게.” 하며 벗어주었다. 현세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의 옷으로 갈아입을 처지인데 무슨 새 옷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손선지가 옷을 벗어준 것은 단순히 인정에서 우러나온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는 전교회장으로 일해오면서 이웃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가르치며 몸에 배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까지도 이웃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1866년 12월 13일 사형날이 왔다. 여섯 교우들은 북문 밖 진터, 곧 군인들의 훈련장인 숲정이에 당도하였다. 그가 처형당하던 모습을 훗날 상관 큰마재(현재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에 사는 최덕수(요셉)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손선지는 처형되기 전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며 예수 마리아를 계속 불렀다.”

손선지와 동료들은 형장에 꿇어앉았다. 구경꾼들의 조롱이 빗발쳤다. 영장은 다시 배교하고 살겠는가, 국법대로 죽겠는가 물었다. 여섯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죽겠다고 대답하자 사형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영장은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고기 한 점씩을 주었다. 사자밥이었다. 군인들은 그들을 말뚝에 묶고 머리 밑에 나무토막을 받쳤다. 손선지는 동료들 중 마지막 차례로 처형되는데, 휘광이의 칼이 얼굴로 빗나가자 고개를 들고 휘광이에게 단칼에 치지 못한다고 꾸짖었다. 드디어 두 번째 칼이 그의 목을 끊었다. 47세 장무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오사현의 주선으로 거두어졌다. 오사현은 처형된 지 나흘 되던 날 신도들이 거두어준 돈으로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두 개를 사고 담꾼 열두 명을 사서 여섯 시체를 장사지내는데, 처형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장대(군 지휘소) 건너 범바위(부엉바위) 아래 도랑 가에 가매장하였다.

손선지가 처형된 후 그의 칠순 노모인 임 세실리아, 아내인 김 루시아, 장자인 손순화(요한, 29세), 며느리 서 아나스타시아, 딸 데레사, 12세 된 아들 마태오, 그리고 토마스는 천호 마을로 이사하였따. 1867년 정원 그믐(양력 3월 6일)이었다. 손순화는 그의 동생 막달레나의 남편 손경영(요한)과 정문호와 한재권의 가족과 함께 순교자들의 유해를 반장(返葬)하기 위해 가매장터로 갔다. 일행들이 무덤 앞에 도착하였을 때, 내 건너 장대 앞에서 “온다. 온다.” 하는 소리가 세 번씩이나 났다. 그래서 함께 간 일행들이 자기들을 목겨한 군인들이 하는 소리로 알고 놀라면서 지금까지도 시체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조금 있으니 잠잠해지고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이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으나, 그래도 마음은 계속해 떨려 무덤을 팔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안개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깔렸고, 이상하게 붉은 광채가 다른 곳은 비추지 않고 무덤만 비춰주어 이장을 할 수 있었다.

오사현은 가매장할 때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 각각 명패를 꽂아놓았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가족들은 누구의 가묘인지 분간할 수 있어 일하기가 쉬웠다. 그들은 시체를 염하여 메고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 얼마쯤 오자 안개가 말끔히 걷혔다. 그래서 함께 간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가무덤에서 일어난 현상을 기적이라 하였다. 손순화는 아버지 손선지의 유해를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무능골에서 건너 보이는 산에 안장하였다. 그후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지만, 계속하여 성묘를 다닐 뿐 아니라 천호 마을에 사는 교우에게 묘지 관리를 부탁하여 보존해 왔었다. 이후 손선지는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 1984년 5월 6일 시성(諡聖)되었다.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1998, 291-295 참조)
성 손선지 베드로 묘지

[ 성 손선지 베드로 기도문 ]

하느님 아버지!
성 손선지 베드로를 일찍부터 당신 일꾼으로 부르시어,
박해 중에서도 선교사로서의 모범을 보이다가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누리도록 이끄셨으니,
우리 평신도들도 성인의 표양을 따라 복음 전파에 헌신하여,
소박한 일상생활 가운데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을 증거하고,
훗날 성인과 함께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관련성지

1. 지석리 성지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368-1 / 041-836-0067 (대전교구 홍산성당)

2. 전주 숲정이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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